"일본은 이제 끝났다." 1990년대 이후 우리가 뉴스나 매체를 통해 수없이 들어온 익숙한 문장입니다. 극심한 디플레이션과 제자리걸음인 임금을 지켜보며, 많은 분들이 '일본 잃어버린 30년'을 경제가 완전히 붕괴된 파국의 모습으로 상상하셨을 텐데요.
사실 저도 처음에는 관련 통계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언론에서 묘사하는 절망적인 분위기와 달리, 일본은 여전히 미국, 중국, 독일에 이어 세계 4대 경제대국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토록 기나긴 침체의 터널 속에서도 나라 전체가 무너지지 않고 튼튼하게 버틸 수 있었을까요?
오늘 글에서는 일본 초엔저 현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일본이 아직도 세계 4대 경제대국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 5가지를 알기 쉽게 풀어보고자 합니다.
핵심 요약 포인트 3가지
- 과거 버블 경제 시절 쌓아둔 막대한 인프라와 자본이라는 '압도적 출발선'이 든든한 체력이 되었습니다.
- 단순 완성품 수출국을 넘어, 해외 자산의 이자와 배당으로 부를 축적하는 거대한 '투자 소득 국가'로 탈바꿈했습니다.
- 대체 불가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지배력, 1억 2천만 명의 내수 시장, 자국민이 방어하는 국채 구조가 경제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일본 잃어버린 30년'의 숨겨진 진실
보통 경제가 무너졌다고 하면 거리로 나앉은 실업자들과 줄도산하는 기업의 삭막한 풍경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지난 세월 일본의 발자취는 뒤로 물러선 '마이너스 성장'이 아니었습니다. 매년 1% 안팎으로 아주 느릿느릿하게나마 앞으로 걷고 있었던 플러스 성장이었죠.한국이나 중국이 폭발적인 굉음을 내며 전력 질주를 하는 동안 천천히 걸어갔기에, 상대적으로 격차가 벌어져 '잃어버렸다'는 꼬리표가 붙은 것입니다. 물가가 오르지 않는 대신 임금도 동결되었기에, 서민들의 지갑 속 실질적인 구매력은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지 않았습니다. 서서히 하강 곡선을 그렸을 뿐이죠. 그렇다면 이 완만한 하강 속에서 국가 경제를 지켜낸 5가지 단단한 무기는 무엇일까요?
1. 비교조차 불가능했던 '압도적인 출발선'
1990년 버블이 꺼지기 직전의 일본을 기억하시나요? 당시 일본의 경제 규모는 세계 3위부터 12위 국가를 모조리 합친 것과 맞먹는 덩치였습니다. 도쿄 중심가의 노른자위 땅만 팔아도 미국 캘리포니아주 전체를 통째로 살 수 있다는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화려한 황금기에 지어둔 끝없는 고층 빌딩숲, 거대한 항만과 발전소, 그리고 세계 뻗어나간 거대 기업들은 거품이 꺼졌다고 해서 신기루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신흥국들이 아무리 숨을 헐떡이며 추격해 와도, 애초에 서 있던 출발선 자체가 까마득히 높았기에 장구한 세월을 버틸 수 있는 첫 번째 맷집이 되어주었습니다.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자본의 힘을 상상해 보세요. 거대한 미국 국채에서 매년 떨어지는 막대한 이자, 호주와 중동의 가스전, 동남아의 발전소를 꽉 쥐고 있는 일본 종합상사들의 지분 수익까지. 비바람이 몰아쳐도 알아서 찰랑찰랑 차오르는 거대한 돈의 우물을 집 밖에 파둔 셈입니다.
그 화려한 황금기에 지어둔 끝없는 고층 빌딩숲, 거대한 항만과 발전소, 그리고 세계 뻗어나간 거대 기업들은 거품이 꺼졌다고 해서 신기루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신흥국들이 아무리 숨을 헐떡이며 추격해 와도, 애초에 서 있던 출발선 자체가 까마득히 높았기에 장구한 세월을 버틸 수 있는 첫 번째 맷집이 되어주었습니다.
2. 물건 파는 시대를 지나 '투자 소득 국가'로의 진화
아직도 많은 분이 일본을 자동차나 가전제품을 열심히 수출해서 먹고사는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일본 경제는 완전히 다른 옷을 입고 있습니다. 수출 무역 장사에서는 오히려 수십조 원의 적자를 보지만, 해외에 뿌려둔 자산에서 거둬들이는 이자와 배당금(1차 소득 수지)으로 한 해에만 약 400조 원을 벌어들입니다.조용한 사무실 안에서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자본의 힘을 상상해 보세요. 거대한 미국 국채에서 매년 떨어지는 막대한 이자, 호주와 중동의 가스전, 동남아의 발전소를 꽉 쥐고 있는 일본 종합상사들의 지분 수익까지. 비바람이 몰아쳐도 알아서 찰랑찰랑 차오르는 거대한 돈의 우물을 집 밖에 파둔 셈입니다.
3. 보이지 않는 곳의 절대 강자, '소부장' 경쟁력
TV나 스마트폰 같은 완성품 진열대에서는 삼성이나 애플에게 자리를 내준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기기들의 뚜껑을 열고 들어가 '소재, 부품, 장비(소부장)'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반전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머리카락보다 얇은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묵직하고 정밀한 기계음의 중심에는 항상 일본 기업이 있습니다.반도체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의 세계 시장 점유율 90% 이상을 일본이 장악하고 있으며,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작은 부품과 공장 자동화 로봇 시장에서도 이들의 지배력은 경이롭습니다. 한국과 중국, 대만이 완성품 시장에서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일수록, 그 뒤에서 조용히 미소 지으며 필수 재료와 장비를 공급하는 영리한 생태계를 구축한 것입니다.
최근에는 여기에 연간 3,800만 명이 넘는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와 수십조 원의 돈을 뿌려주는 '관광 특수'라는 새로운 엔진까지 장착했습니다. 해외 시장에서 잠시 비틀거려도 집 안에서 든든하게 버텨낼 수 있는 견고한 내수 시장이 바로 네 번째 비결입니다.
4. 1억 2천만 명의 막강한 내수 시장과 관광 특수
경제 규모를 평가할 때 '인구 1억 명'은 대단히 상징적인 기준선입니다. 외부로 물건을 단 한 개도 수출하지 못해도, 1억 2천만 명에 달하는 자국민들이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 것만으로 대기업이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1인당 소득이 3만 달러가 넘는 지갑이 두둑한 소비자들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 정도의 인구와 소득을 동시에 갖춘 나라는 미국과 일본 정도뿐이죠.최근에는 여기에 연간 3,800만 명이 넘는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와 수십조 원의 돈을 뿌려주는 '관광 특수'라는 새로운 엔진까지 장착했습니다. 해외 시장에서 잠시 비틀거려도 집 안에서 든든하게 버텨낼 수 있는 견고한 내수 시장이 바로 네 번째 비결입니다.
5. 빚잔치에도 터지지 않는 '자국민 중심'의 부채 구조
일본 경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GDP 대비 250%를 훌쩍 넘는 천문학적인 국가 부채입니다. 일반적인 국가라면 벌써 외환위기를 겪고 IMF에 손을 벌렸을 무서운 숫자죠. 그런데도 경제가 폭발하지 않는 절묘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빚을 누가 들고 있느냐'의 차이입니다.일본 국채의 90% 가까이는 일본 중앙은행과 시중은행, 즉 자국민들이 들고 있습니다. 외국인 보유 비중은 10% 남짓에 불과하죠. 게다가 이 거대한 빚은 전부 자기네 돈인 '엔화'로 발행되어 있습니다. 외국 자본이 어느 날 불안감을 느끼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나라의 환율을 붕괴시키는 구조적 위기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그들만의 거대한 금융 방파제인 것입니다.
이 거대한 갑옷에도 금이 가고 있을까?
지금까지 '일본 잃어버린 30년' 속에서도 어떻게 세계 4대 경제대국이라는 타이틀을 지켜내고 있는지, 그 단단한 5가지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들여다볼수록 참 정교하고 촘촘하게 짜인 경제 생태계라는 점이 신기하지 않나요? (언제나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라고 생각합니다.)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방어막은 없듯, 이 단단한 갑옷에도 서서히 균열이 생기고 있습니다. 고령화로 인해 국채를 떠받쳐주던 은퇴 세대의 자산이 점차 소멸하고 있고, 인구 감소로 내수 시장마저 쪼그라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이 거대한 경제 체제가 서서히 말라가는 냄비 속 개구리가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 30년 만에 꿈틀거리는 임금 인상과 금리 인상을 보며 오랜 잠에서 깨어날 준비를 하는 것 같아 흥미로움도 동시에 느낍니다.
과연 일본 경제의 진짜 시험대는 지금부터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본이 지금 진짜 반등의 기회를 꽉 움켜쥔 것일까요, 아니면 두꺼운 갑옷 안에서 천천히 저물어가는 중일까요?
